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쿠무라 다케오 (문단 편집) === 라바울 항공대 === 1943년(쇼와 18년) 7월, 제201해군항공대로 소속을 옮긴 오쿠무라 다케오는 다시 라바울 기지로 돌아갔다. 그는 해군의 비상 활주로를 겸하고 있던 부인 기지로 가서 작전에 참가했다. 9월 14일에 [[연합군]]의 대규모 공습 부대가 부인 기지로 접근해오자, 오쿠무라는 기지 방어를 위해 긴급 출격했다. 그는 이날의 교전에서 무려 10대의 격추를 보고했는데, 그 내역은 [[B-24]] 중폭격기 1대, [[F4U]] 1대와 5대의 [[F6F]], 그리고 미 육군 소속의 [[P-40]] 전투기 2대와 마지막으로 [[SBD]] 1대였다. 이 격렬한 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고 살아 돌아온 오쿠무라에게는 11항함 사령관인 구사카 진이치(草鹿任一) [[제독]]이 직접 무공훈장을 수여해주었다. 오쿠무라는 9월 22일에도 [[뉴기니]] 폰반도 레틴 곶 앞바다를 통과하는 연합군의 수송함대를 공격하러가는 아군 폭격기들을 엄호하기 위해 출격하지만, 돌아오지 못했다. 가와이 시로(河合四郎) 대위가 지휘한 이 전투에서 귀환한 동료 전우들의 증언에 따르면, 오쿠무라 다케오는 50대가 넘는 [[P-38]]과 P-40의 합동 공격에 맞서는 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한다. 항공대장은 전사한 오쿠무라가 세운 공적을 기리기 위해 2계급 특진과 금치 훈장 추서를 상신했지만, 이 서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